"새우젓 창고였다고?" 우리가 몰랐던 광명동굴의 반전 과거

 

지금의 화려한 테마파크가 되기까지, 광명동굴은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요?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의 아픔부터, 40년간 새우젓을 품던 거대한 냉장고 시절을 거쳐, 연간 100만 명이 찾는 문화 창조 공간이 되기까지. 광명동굴의 파란만장한 100년 역사를 들여다봅니다.

반짝이는 빛의 향연, 신비로운 지하 세계, 향긋한 와인이 가득한 곳.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광명동굴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 짙은 어둠 속에서 짭조름한 새우젓 냄새를 품고 있던 버려진 공간이었습니다. 화려한 현재 이면에 숨겨진 광명동굴의 파란만장한 과거. 그 100년의 시간 여행을 함께 떠나볼까요? 😊

 

1. 1912년, 식민 수탈의 현장 '시흥광산' ⛏️

광명동굴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의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이곳에 광산을 개발했고, '시흥광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광산에서는 금을 비롯해 은, 동, 아연 등 산업 자원이 대량으로 채굴되었습니다.

이 시기 광명동굴은 단순한 광산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조선인이 징용으로 끌려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던, 민족의 아픔과 한이 서린 현장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걷는 동굴의 통로는 그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길인 셈이죠.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수도권 최대의 금속 광산으로 명맥을 이어갔지만, 그 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2. 1972년, 버려진 동굴과 새우젓 저장고 🦐

1972년, 기록적인 대홍수로 인해 광산 주변이 물에 잠기면서 막대한 복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광산은 결국 문을 닫게 됩니다. 황금을 캐내던 동굴은 하루아침에 어둡고 축축한 폐광으로 전락했죠.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동굴은 새로운 쓰임새를 찾게 됩니다. 바로 **'새우젓 저장고'**로서의 역할이었죠. 1년 내내 12~13도를 유지하는 동굴의 서늘하고 일정한 온도는 새우젓을 숙성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이후 약 40년간, 소래포구에서 들어온 새우젓 통들이 동굴 내부를 가득 채웠고, 광명동굴은 세상에서 가장 큰 천연 냉장고로 조용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3. 2011년, 문화와 예술을 품은 기적의 공간으로 ✨

2011년, 광명시가 이 버려진 동굴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매입하면서 극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짭조름한 새우젓 냄새가 배어있던 어두운 동굴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최신 기술이 결합된 창의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삭막했던 갱도에는 화려한 LED 조명이 설치되고, 광부들의 쉼터였던 넓은 공간은 공연과 미디어아트 쇼가 펼쳐지는 '동굴 예술의 전당'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유료화 개장 이후, 광명동굴은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로 우뚝 섰습니다. 식민 수탈의 현장에서 새우젓 저장고로, 그리고 이제는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리는 창조 경제의 아이콘으로. 광명동굴의 변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
광명동굴은 쓸모없어진 산업 유산을 창의적으로 재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도시재생'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4. 광명동굴의 변천사 한눈에 보기 📜

연도 주요 사건 공간의 의미
1912~1945 일제에 의해 '시흥광산'으로 개발 자원 수탈과 강제 징용의 아픔
1945~1972 수도권 최대 금속 광산으로 운영 대한민국의 산업 현장
1972~2010 홍수로 인한 폐광, 새우젓 저장고로 활용 버려진 산업 유산, 천연 냉장고
2011~현재 광명시 인수 후 동굴 테마파크로 개장 문화 예술 창조 공간, 도시재생의 아이콘

광명동굴을 방문하신다면, 화려한 볼거리와 함께 이곳이 품고 있는 100년의 역사를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평범한 동굴 탐험이 훨씬 더 깊고 의미 있는 시간 여행이 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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